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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정선

겸재정선 소개

초년시절 정선의 학문적·예술적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같은 동네에 대를 이어 살고 있었던 안동 김씨 집안이었다. 이들 중 정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시인으로 조선후기 문예에 큰 족적을 남긴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었다. 김창흡은 금강산, 설악산을 자주 드나들며,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시로 읊어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정선은 김창흡 문하생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예술적으로 성장을 했으며, 그중에서도 진경시의 대가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는 평생에 걸친 지기가 되어 시화詩畵를 서로 교환하였다.

정선이 회화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 결정적 계기는 37세 때 이병연 등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해악전신첩》을 그린 것이다. 현재 《해악전신첩》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바로 전해인 1711년, 36세 때 그린 《신묘년풍악도첩》이 남아 있어 이시기 정선의 화풍을 보여준다. 정선의 30-40대는 정선 특유의 진경산수화풍이 형성되는 시기로 북종화법과 남종화법의 장점을 결합시키고, 음양이 잘 조화된 화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정선의 초기작은 실경산수와 회화식 전통에 근거하여 마침내 조선의 그림 속에 조선의 풍경과 사람들 모습이 등장하는 진경산수라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게 된다.

회갑을 넘긴 노년기 정선은 더욱 무르익은 경지를 보여준다.

특히 정선은 만 5년간 한강변의 경치 좋은 양천현령(65-70세)으로 재직하며, 이병연과 시화를 교환해보자는 약속에 따라 양천(지금의 강서구)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한강변의 명승지를 그려 남긴다. 이 기념비적인 역작이 《경교명승첩》이다. 이제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종래의 험준하고 힘찬 산악미에다가 부드럽고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겸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는 이미 완성된 한국적 진경산수화가 더욱 원숙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화가들 중 드물게 장수한 정선은 칠십대 이후 붓을 들면 의식하지 않아도 그림이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자유스러운 필묵법은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는 경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언뜻 보면 미완성인 것 같은 파격적 구도와 생략적 묘사가 종종 등장한다. 정선은 81세 때에는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승차하는 등 명예로운 만년을 보내다가 1759년 84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